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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주목하는) 시선 2018’로 <‘여순사건’의 전국화는 가능한가> 선정
이름 관리자 이메일 kncc@kncc.or.kr
작성일 2018-12-31 조회수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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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NCCK 언론위원회 ‘(주목하는) 시선은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한 여순사건을 선정했다. 여순사건은 그 발단이 되었던 제주4·3에 비해 아직도 냉전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언론위는 여순사건의 자리매김은 70주년이라는 숫자상의 의미를 넘어서 냉전분단체제의 진정한 해체와 촛불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이에 정치권을 비롯하여 학계, 시민단체, 언론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의미에서 10월의 시선으로 선정한다.

 

2018년은 각종 70주년의 해

 

올해 2018년은 정부수립 70주년의 해다. 광복 3주년을 맞은 1948815일이 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다.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48년에 일어난 여러 역사적인 기념일과 조우하게 된다. 이를 하나씩 톺아보면 43일은 제주4·3 70주년이고, 717일은 제헌절 70주년이다. 101일은 국군의 날 70주년이다. 그리고 1019일은 여순사건 발발 70주년의 날이다. 모두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의 궤적이다.

이중 제헌절이야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기념일이지만 국군의 날에 대해서는 그 역사성과 적절성에 대해서 논란이 있어 왔다. 또 하나는 제주4·3 기념일이다. 4·3은 기나긴 세월 동안 금기시되며 ‘4·3사태혹은 ‘4·3사건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대통령 사과, 특별법 제정 등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은 지 오래다. 그 의의는 문재인 정부에 들어 재삼 확인되고 있다.

다만 관 주도의 행사에서는 제주4·3’으로, 특별법에서는 ‘4·3사건등으로 불리지만 학계와 시민사회 등에서는 ‘4·3항쟁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는 4·3의 정명(正名)에 대한 본격적인 공론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단계다. 그야말로 사건사태를 넘어 항쟁으로 재명명(再命名), 정명(正名)의 시점이 다가오는 모양새다. 이름짓기 또는 찾기는 사건과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4.3과는 다르게 전개된 여순사건

 

그런데 시기적으로 제주4·3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4·3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여순사건이다. 주지하다시피 여순사건‘19481019일 전남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일단의 14연대 군인들이 (....)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70년 전의 이 사건을 둘러싸고 진상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의 맥락을 둘러싼 갈등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단적으로 지난 1019일 여순사건 70주년 합동추념식에서 일어난 반란시비가 그것이다. 이날 추념식은 그동안 서로 대립해온 민간인 유족과 경찰 측 유족이 처음으로 화해하는 자리로 준비됐다고 한다. 이전까지 양측은 매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위령제순국경찰관 추모제란 행사를 따로 치러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동추념식을 앞두고 돌연 경찰 유족·경우회 여수지회 회원들은 불참을 통고했다.

이날 오전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광장에서 유족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합동추념식은 추모공연, 추모시 낭송, 4대 종단별 종교의식 등으로 이어졌다. 보도에 따르면 행사가 시작된 지 30여분쯤 경과보고순서 때 사달이 났다고 한다. 마이크를 잡은 고 아무개 추념식 집행위원장이 여순사건은 좌익 군인이 일으킨 반란이라고 언급했다. 이 발언이 나오자 행사장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고, 일부 민간인 유족들은 강하게 항의했다고도 한다. 70년 세월로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드러난 것이다. ‘섣부른 통합의 한계라고 할 것인가.

 

항쟁NO, ‘사건YES

 

그런가 하면 올해의 70주년을 기리기 위하여 일찍부터 기획한 지역의 문화 행사에도 불똥이 튀었다. 지난 1월부터 준비해온 여순항쟁 그림전은 최근 미술관 전시를 포기했다고 한다. 여수시가 항쟁이 아닌 사건으로만 표기를 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여순사건을 다룬 오페라 ‘1948, 침묵의 팸플릿에서도 항쟁이라는 표현이 지워졌다. 여수시가 항쟁표현을 자제하라고 권고한 이후 여수 심포니오케스트라 측은 여순항쟁여순 10·19’로 고쳤다.

지자체로서는 여순사건을 여전히 반란으로 보는 시선이 많아 항쟁반란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 갈등을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수시 관계자는 시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사업에 한해 여순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와 합의한 공식 명칭을 따를 것을 권고한 것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이에 대해 여순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사건, 반란, 항명, 항쟁...

 

이른바 여순사건19481019일의 발발에서 1027일의 완전 진압까지 통산하면 9일 내외의 기간이 걸렸던 사건이다.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관점이 필요하다. 1999년에 시작된 MBC 현대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여순사건 편을 제작한 이채훈 피디는 초반부는 14연대 반란, 중반부는 민군합동 무장항쟁, 후반부는 진압군의 민간인에 대한 학살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주철희는 여순항쟁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기존의 반란이라는 명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반란의 목적은 체제 전복 또는 정권 찬탈이다. 따라서 첫째, 현 권력자를 축출한다. 둘째, 수도를 점령한다. 셋째, 후임 권력자를 미리 결정한다. 넷째, 주도세력은 정부 요직에 있거나 대병력 동원이 가능한 군사 지휘관이다...”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적시하고, 14연대 병사들은 체제전복이나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반란이 아니라 군형법상의 항명(抗命)’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홍구는 “(그런 점에서) 여순사건은 항명으로 재규정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항명이라 해서 여순사건의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사건 초기 봉기군이나 토착 좌익 세력이 자행한 학살은 아무리 친일파에 대한 분노가 크고 극우 세력이 그동안 잔혹한 행위를 해왔다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다.

이어서 그는 또 대구 10·1폭동‘10월 인민항쟁으로, ‘제주 4·3폭동제주 4·3사건이나 ‘4·3항쟁으로, ‘광주사태‘5·18민주화 운동이나 광주민주항쟁으로 정명(正名)’을 얻어갔건만 여순사건만큼은 아직도 반란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여순사건의 경우 1997년도부터 국사교과서에서 사건의 명칭을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쓰고 있지만, 아직도 일반국민 대다수에게는 여순사건보다 여순반란이 더 익숙한 명칭인 현실을 적시했다.

 

여순사건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NCCK 언론위원회가 ‘10월의 시선에서 여순사건 70주년을 주목하는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다. 제주4·3과 광주5·18이 오랜 노력과 절치부심 끝에 재명명되면서 전국화의 의미를 획득해 나아간 것에 비해 여순사건은 상대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와 지역성에 포박되어 있었다. 위에서 예로 든 70주년 행사와 관련한 두 개의 사건 역시 10월의 한국 언론이 간과하거나 홀대했다고 할 수 있다.

올해 70주년을 맞이하여 KBS순천, 여수MBC 등 지역언론에서는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활발하게 전개했지만 전국적 미디어의 준비된 접근은 눈에 많이 띄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의 기사가 돋보였다. 70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하지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진상규명이나 국가의 사과와 책임인정 정도는 현저히 부족한 실정이다. 사건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은 별로 변화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때마침 민주평화당 박지원 전 대표는 지난 1026일 법사위 군사법원 국정감사 보충질의에서 “1019일이 여순사건 70주년이었다. 제주4·3 특별법은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서 특별법이 제정되어 관련자 명예도 회복되고, 화해의 길도 가고 있지만 유독 여순사건은 5번의 법안이 발의했는데도 국방부가 반대해서 통과되지 않았고, 거창 양민학살 사건도 19대 국회에서 특별법이 발의되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이러한 암울한 역사도 문재인 정부에서 이제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점에서 박태균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그는 “(여순 사건이) 역사 속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방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전국성과 함께 보편적 사건의 하나였다는 점을 증명하여야 한다. 둘째로 여순사건이 한국의 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했던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 중 하나였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언명했다.

여순사건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학계와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많다. 한홍구는 여순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인식이 왜곡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정희와 여순사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여순사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는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에 따르면 여순사건의 자리매김은 70주년이라는 숫자상의 의미를 넘어서 냉전분단체제의 진정한 해체와 촛불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목하 정치권을 비롯하여 학계, 시민단체, 언론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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